[이재명 대통령 발언 분석] 경험 살려 소외된 시민까지 직접 호명… 방향 선명하지만 국정 책임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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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임’은 두 차례 쓰였을 뿐이지만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본래 의미와 거꾸로, 각 분야를 촘촘히 들여다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신현기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연설은 미리 정제한 메시지를 전체 국민에게 전달하고 여론을 움직인다는 의미의 고잉 퍼블릭(going public) 전략”이라며 “이와 달리 이재명 대통령의 메시지 특징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의 유비쿼터스(Ubiquitous)라고 할 수 있고, 개별 사안에 따라 개별 국민을 따로 불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보인 이 대통령의 ‘만기친람’식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은 지난 8일까지 나온 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포함한 공식 메시지와 국무회의, 부처별 업무보고에서의 발언을 모두 모았다. 2만4000여개 문장, 71만7000여자에 달했다. 말의 뼈대를 이루는 명사 등의 형태소를 추출한 뒤 평균 이상 자주 함께 등장하는 단어로 ‘말의 지도’를 그렸다. 지도에는 ‘생각-수준-정도-가격-규모-진척’ 등 일하는 방식을 암시하는 줄기들이 많이 보였다. 이어진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면 “생각, 수준은 어떤 정도이며 규모나 가격은 어떠하며, 진척은 얼마나 됐나” “예를 들어 어떤 경우가 있고, 해결 방식이나 제재 방안은?” 등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자신의 실천력을 강조해왔다. “진짜 말한 대로 하거든요. 쏠 때는 반드시 실탄으로 쏴야 합니다.”(2021년 9월,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대통령이 된 뒤 이런 특성은 ‘속도전’으로 드러났다. 국토교통부 업무보고에서는 고속도로 휴게소 문제에 대해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하라” “지지부진한 건 안 하는 거하고 똑같다”며 여러 차례 신속 해결을 주문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업무보고에서도 농어촌 기본소득을 언급하며 “빨리 신속하게 너무 지연되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실질적 성과를 내라는 발언도 두드러졌는데, 역시 처음은 아니다. ‘시사IN’은 2021년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토론 발언을 분석해 ‘거래의 리더십’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자신에게 표를 주면 이익과 성과를 돌려주겠다고 설득한다는 것이다. “국민 삶의 실질적 변화를 만드는 ‘증명의 정치’”(2025년 7월, 취임 한 달 기자회견) “국민들도… ‘내 삶은 뭐가 좋아졌지?’ 그런 판단이 들면 ‘뭐 똑같네, 더 나빠졌네’ 하니”(제32회 국무회의) 등의 발언도 그런 평가와 닿아 있다.
여기서 국민은 세대와 지역과 이념을 아우르는 평균적 개념은 아니다. 다양한 처지, 구체적인 삶과 형편을 직접 언급한다. “일주일에 4일, 12시간씩 맞교대하며 밤낮 바뀌어 일할 경우 피로에 시달리고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지난해 7월,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 “바가지 자체는 행정 제재 사유가 되나요?” “게임 관련해서 그 현장에 불만이… 비싼 거는 안 뽑힌다 뭐 그런 거죠? 이거 어떻게 통제하고 있어요?”(문화체육관광부 등 업무보고) “탈모도 병의 일부 아니냐”(보건복지부 등 업무보고).
이러한 언급은 이 대통령 개인의 경험과 연결 지으면서 극대화된다. “우리 여동생이 그 일 하다가 새벽에 화장실에서 사망했는데 산재 처리를 안 해줘 가지고…”(고용노동부 등 업무보고) 국민이나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으로도 이어진다. “현장 간담회든지, 면담이든지, 현장 순찰이든지 이런 것을 최대한 많이 해야…”(제37회 국무회의) “세관이 아니라 공항공사가 하는 게 맞는데라는 댓글이 있더라고요. 대중들은 다 아는 거예요.”(산업통상부 등 업무보고)
신현기 교수는 “국무회의, 업무보고를 공개한 것은 획기적이고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평가하면서도 “대통령의 가시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자신이 국정운영의 중심임을 각인시키는 권력행위라는 측면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고 다듬었던 강원국 작가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이어져 효능감이 있다는 건 장점”이라며 “말이 단정적이어서 문제가 생겼을 때 퇴로가 없다는 단점도 있다”고 했다. 대선 토론 분석 경험이 있는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발언이 많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라며 “동시에 책임져야 할 부분도 많고 예상과 달리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말의 지도에서 중심 부분에 있는 것은 ‘협력-교류-양국-관계-동반자’ 등 외교 분야의 언급이다. 취임 초반 활발한 외교 행보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이어지면서도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경제-성장-발전-산업-기업’ 부분이다. 단어를 이어 문장을 만들면 “대한민국을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 등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분배보다 성장에 방점을 둔 ‘우클릭’ 행보를 보였다. 지난해 7월 세계정치학회 서울총회 개막식 연설에서는 “우리 옛말에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 이런 얘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 대통령이 자주 쓴 단어를 산출해보니 ‘성장’이라는 단어가 전체 추출 어휘의 0.52%를 차지해 열 번째로 많았다. 문민정부 이후 ‘성장’이라는 단어가 20위권 내에 들어간 경우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유일했는데, 그마저도 15위(0.41%)였다. 이 대통령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협력’(3위), ‘미래’(6위), ‘앞’(12위) 등도 전임자들보다 자주 썼다. ‘미래’가 20위권 내에 들어간 경우는 박근혜, 윤석열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말의 지도에서는 ‘공직-사회-책임-일-국민-삶’ 등 공직자의 자세를 의미하는 부분도 눈에 띄었다. “주인의 일을 대신하는 머슴이기 때문에… 주인의 이익에 최대한 부합하게”(해양수산부 등 업무보고)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은 2017년 <이재명, 대한민국 혁명하라>에서 “공무원 관료 조직은 ‘로보트 태권브이’ 같은 존재”라고 썼다. 누가 이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다. 해수부 등 업무보고에서도 “조직의 최종 책임자들이… 혜택만 누리고… 책임이나 역할을 제대로 안 하는 건 제가 그냥 눈 뜨고 못 봐주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 발언에서는 행정가적 면모가 돋보인다. 정치와 행정은 다르다고도 말했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 속에서 대응하는 거 하고, 국민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놓고 행정을 직접 집행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산업부 등 업무보고) 말의 지도에서도 정치와 관련된 줄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현기 교수는 “대통령은 행정가이기도, 정치인이기도 하다”며 “실용적으로 국정을 이끄는 모습은 좋지만, 자칫 이익을 조정하고 소통을 활성화하는 정치의 영역이 축소되고 국정운영이 효율성 중심으로만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공식 메시지나 연설문에서 ‘기후위기’나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은 문민정부 이후 대통령의 공식 메시지와 연설문을 모두 수집해 말의 뼈대가 되는 명사 등을 중심으로 단어를 추출했다. 명사가 연속되는 경우 붙여서 따로 하나의 단어로 추가했다. 그런 다음 이전 대통령 모두가 언급한 적이 없는 단어들만 모았다.
대통령별로 가장 많이 쓴 새 단어는 햇볕정책(김대중), 소·대연정(노무현), 녹색성장(이명박), 경제혁신(박근혜), 코로나19(문재인), 늘봄학교(윤석열), 친위쿠데타(이재명) 등 당시 정부의 어젠다나 시대 상황을 담고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새 단어 중에는 사회안전망을 의미하는 ‘매트리스’나 과도한 규제를 지칭하는 ‘거미줄규제’ 등 비유적 표현이 눈에 띄었다. GPU, 디스토피아, 새끼호랑이 등 인공지능 관련 단어도 보였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서생’이라는 단어도 처음 썼다. 이 말은 김 전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한 말로, 공식 메시지는 아니었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 대통령은 ‘서생’도 그렇고, 기술 관련 용어의 첫 사용이 많은 것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닮아 있다”며 “디스토피아 같은 단어의 사용을 보면 전문가들의 우려사항이나 정보를 민첩하게 잘 수집하고 있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디지털’을 비롯해 IT강국, BT(생명과학기술) 등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관련 용어들을 처음 사용했다. 비즈니스, 장사, 발명 등의 단어도 처음 썼다. ‘레저’도 처음 언급했는데, 사회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인권국가’라는 단어 조합과 이희호 여사를 지칭하는 ‘아내’라는 말도 처음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친북)좌파, 진보진영 등 정치 관련 용어의 첫 사용이 두드러졌다. 특권 없는 사회를 강조하면서 ‘반칙’이라는 단어도 처음 사용했다.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린 만큼 ‘네티즌’이라는 용어도 처음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K팝’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최초 언급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라고 처음 명명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단어를 독특하게 조합한 것들이 많았다. ‘카르텔’의 경우 이권, 사교육, 부패 등과 연결해 썼다. 가짜평화, 공산전체주의세력, 노사법치주의, 허위선동 등도 비슷한 경우다.
대통령마다 내건 기치나 구호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랐다. 글로벌책임강국(이재명), 글로벌중추국가(윤석열), 글로벌경제대국(문재인), 글로벌대한민국(박근혜) 같은 식이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반도평화실현(김대중), 한반도평화통일(박근혜), 한반도평화구상(문재인), 통일한반도실현(윤석열), 한반도평화공존(이재명) 등 정부의 특성에 따라 ‘공존’ 혹은 ‘통일’에 각기 방점을 뒀다.
대통령별로 많이 쓴 단어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대통령에서 ‘국민’이 1위였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세계’를,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제’를 가장 많이 사용한 것으로 나왔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세계 금융위기를, 박 전 대통령은 경제혁신을 많이 언급한 때문으로 보인다.
상위 5위 안에는 대체로 국민, 세계, 경제 등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신현기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집권 배경이 달라도 대통령이 되면 공통의 문제에 부딪힌다”며 “국민을 지속 호명함으로써 자신을 국가운영과 통합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평화, 남북 등의 단어는 상위 20위권 내에서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모두 등장했다. 반면 ‘기업’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만 나타났다. 신현기 교수는 “민주화 이후 이념 갈등이 남북관계, 기업과 시장의 자율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김경 서울시의원으로부터 공천헌금 1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 강선우 무소속 의원이 20일 경찰에 처음 출석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공공범죄수사대는 이날 오전 9시쯤 강 의원을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를 진행했다. 지난달 29일 강 의원이 김 시의원으로부터 공천헌금을 받은 정황이 담긴 녹취가 언론에 공개된 지 약 3주 만이다.
강 의원은 이날 출석하며 기자들에게 “이런 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제 삶에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말한 뒤 조사실로 향했다. ‘공천헌금 1억원을 받았느냐’ 등 취재진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강 의원은 202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자신의 지역사무실 사무국장이자 보좌관인 남모씨를 통해 김 시의원으로부터 1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앞서 김 시의원과 남씨에 대한 조사를 각각 세 차례 진행했다.
경찰 조사에서 관련자들의 진술은 엇갈렸다. 김 시의원과 남씨 모두 지방선거를 앞둔 2022년 4월14일쯤 서울 한 카페에서 강 의원까지 함께 만났다고 밝혔다. 반면, 강 의원은 당시 자리에 없었다며 세 사람이 함께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공천헌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를 두고는 세 사람의 주장이 모두 다르다. 김 시의원은 남씨가 먼저 “한 장(1억원)” 액수를 특정해 공천헌금을 제안했고 강 의원에게 직접 금품을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씨는 경찰 조사에서 ‘강 의원 지시로 차에 물건을 실었을 뿐, 돈이 오간 사실은 몰랐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강 의원과 김 시의원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리를 비웠고, 이후 강 의원의 지시로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른 채 차에 쇼핑백을 실었다는 취지다. 강 의원은 2022년 4월20일에 남씨로부터 “김경 시의원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사후 보고를 받았을 뿐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보고를 받은 직후 1억원 반환을 지시했다고도 밝혔다.
양측 진술이 크게 엇갈리자 경찰은 지난 18일 김 시의원과 남씨 사이 대질신문을 시도했으나, 김 시의원이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공천헌금 반환 시점도 주장이 엇갈린다. 강 의원은 남씨에게 보고를 받은 뒤 1억원을 즉시 반환했다고 주장하는데, 김 시의원은 경찰 조사에서 “한 달 뒤에야 돈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시의원은 2022년 6월1일 치러진 지선에서 민주당 단수 공천을 받아 시의원에 당선됐다.
경찰은 이날 조사에서 강 의원을 상대로 금품 전달 자리에 동석했는지 여부, 금품 수수 사실 인지 여부, 1억원 반환 경위, 김 시의원이 단수 공천을 받은 배경 등을 집중하여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이날까지 공천헌금 의혹과 관련해 강 의원을 포함한 피의자와 참고인 등 9명을 조사했다. 최근에는 민주당 서울시당으로부터 김 시의원의 단수공천 과정이 담긴 공천관리위원회 회의 녹취록을 확보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경찰은 이날 김병기 의원의 ‘공천헌금 3000만원’ 수수 의혹 제보를 무마했다는 혐의로 김현지 대통령실 부속실장과 정청래 민주당 대표 등을 고발한 시민단체 관계자도 소환해 조사 중이다.
앞서 민주당 소속이었던 이수진 전 의원은 동작구의원 2명이 김 의원에게 공천헌금 총 3000만원을 건넸다는 탄원서를 당 지도부에 전달했으나 묵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당시 이재명 당 대표실 보좌관, 정 대표는 당 수석최고위원이었다.
대법원 “2021년 헌재 결정 이후부터 배상청구권 행사 가능” 판단“억압적 사회 분위기 참작해야”…시효 소멸 판단한 2심 파기환송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유족들이 과거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에 별도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22일 나왔다.
정부는 ‘유족들이 1990년대 보상금을 받았을 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인지했다’며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유족들이 국가 배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이날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의 유족 34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이미 소멸했다’고 판단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에 돌려보냈다.
앞서 5·18 당시 계엄군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숨진 이들의 가족 34명은 1990~1994년 광주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았다. 당시 광주민주화보상법은 보상금 수령에 동의한 경우 민법상 ‘재판상 화해’가 성립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2021년 5월 ‘정신적 손해’ 부분까지 해당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배상청구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며 위헌 결정을 했다.
이후 5·18 피해자와 유족들은 국가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다수 제기했다. 정부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손해 및 가해자를 인지한 날’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을 내야 하는데, 이 기간을 넘겼다고 했다. 유족들은 헌재 결정이 나온 2021년 5월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은 유족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 재판부는 “단기소멸시효는 늦어도 보상금 등의 지급결정을 받은 날부터 진행된다고 봐야 한다”며 이들이 소송을 낸 2021년 11월에는 배상청구권이 이미 소멸했다고 봤다.
대법원은 대법관 11명 다수 의견으로 유족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국가배상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국민에게 불법을 저지른 행위를 사후적으로 회복·구제하기 위해 만든 권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과거사 사건’에서는 진실규명의 어려움과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 등으로 배상청구권 행사가 사실상 곤란했다면 이런 사정을 함께 참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헌재 결정이 나온 2021년 5월 이후에야 유족들의 배상청구권 행사가 가능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국가배상 소송에서 단기소멸시효(3년)의 기산점(손해를 인지한 날)을 정할 때는 “권리행사의 객관적, 합리적 기대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새 법리를 제시했다.
반면 노태악 대법관은 “5·18민주화운동으로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에 대하여 충분한 배상이 이뤄져야 하지만, 현재 법리로서는 가족 고유의 위자료 청구권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봐야 한다”며 “이들에 대한 구제는 입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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